*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극에서 많이 다뤄 온 이야기는 가부장제와 혈연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비극이죠. 보통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첩을 들이는 데서 얘기가 시작되는 이런 이야기가 영화로 자주 만들어진 이유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가부장제가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후궁: 제왕의 첩> 역시 시작 지점은 비슷합니다. 특히 신상옥 감독의 <내시>(1968), 그리고 이것을 리메이크한 이두용 감독의 <내시>(1986)와 몇몇 인물 설정 및 상황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앞선 두 영화보다 훨씬 정확하고 간결하게 인물의 욕망을 짚어내면서, 궁중의 밀실에서만 가능한 복수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갑니다. 

  세심하게 통제된 실내극인 이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사실 굉장히 높습니다. 촬영-조명과 미술, 사운드 효과와 음악은 각각의 완성도 자체도 높지만, 주어진 선을 절대 넘지 않으면서 감독이 목표한 만큼의 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부분에서 김대승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좋은 편입니다. 특히 김동욱은 헐렁하게만 느껴지는 의상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점점 미쳐가는 성원대군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표현해내죠. 조여정과 김민준은 나쁘지 않은 정도입니다. 조여정은 여배우로서 부담되는 역을 해낸 것만으로도 인정받아야 하지만, 연기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명도 있는 중견 배우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캐스팅도 돋보이는데,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준 박지영을 비롯해 이경영이나 박철민, 오지혜 등도 제 몫을 충분히 다합니다. 

  이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아무래도 시나리오 쪽일 겁니다. 우선 배경 설명이 너무 간략 하고 일부 인물들의 경우 동기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한, 극 전개 과정에서도 내시나 상궁 쪽으로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컷 어웨이를 감행합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힘을 갖는 것은 애초부터 명확하게 정해진 캐릭터 설정이 엔딩까지 유지되며, 플롯 포인트가 비교적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생략한 부분들을 일일이 짚고 넘어갔더라면 극의 템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부분들이기도 하고, 어떤 설명이든 상투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을 테니까요. 

  내시나 상궁 등 실질적으로 궁중 질서를 지탱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중을 높인 것은 일종의 거리두기 장치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주요 인물들에 감정 이입하여 그들 중 한 명의 시선으로 극을 바라보기 보다는, 누가 권력을 잡든 사실상 상관없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제 3자의 시선이 핏줄에 기초한 장자 상속 제도가 내포한 약점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거든요.

  원래 장자 상속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는 쉽게 흔들리기 쉬운 제도입니다. 여성은 자기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자기 핏줄인 걸 확신할 수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부장은 배우자가 낳은 아이가 진짜 자기 핏줄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 줄 수 밖에 없는 거죠. 결국 후계 계승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은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가부장제는 유명무실해지는 거죠. 

  최근의 한국 상업 영화들은 약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관객에게 친절한 편입니다. 어떤 때는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죠. 불필요한 장면을 넣어 설명을 시도하거나, 대사로 빈 곳을 커버하려 노력합니다. 또한 관객 반응을 고려해서 애초의 캐릭터 설정과는 딱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엔딩을 넣기도 하죠. <후궁: 제왕의 첩>의 최대 장점은 그런 경향을 따라가지 않고, 영화적인 템포와 에너지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자기 갈 길을 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확실히 성공을 거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