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발렌타인 (2010) – 결혼의 조건

**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주의하세요.

결혼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습니다. 평생 남남으로 살던 두 사람이 한 집에, 그것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는 것이니까요. 까딱 잘못하다가는 사소한 감정 싸움이 큰 불화로 발전하기도 하죠. 결혼 전에는 상상도 못한 자잘하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요. 아이까지 낳게 되면 가정에서 개인 시간을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수면 시간을 대폭 줄이지 않는 이상.

이 영화 속의 커플도 똑같은 일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기념일 연휴를 앞둔,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한눈에 보기에도 딘과 신디 부부는 삐걱거립니다. 외형적으로는 남편 딘이 문제인 것처럼 보여요. 하나 뿐인 딸에게는 끔찍히 잘하지만, 변변한 직장도 없고 현실 감각이나 생활력이 도무지 없거든요. 그러나 이 커플의 속사정을 하나씩 알게 될수록, 두 사람의 불화를 어느 한 쪽의 잘못으로 돌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결혼 전의 딘은 자기 아버지처럼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진짜 사랑’을 찾고 있었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건물 관리인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딴 남자와 바람이 난 어머니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딘은 상대를 진심어린 사랑으로 보살펴 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믿어 버립니다. 그러다가 신디를 만난 거죠.

신디 역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받은 정서적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접근해 온 남자들 말고, 진정한 사랑을 나눌 파트너를 꿈꿉니다. 영화에선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두 번 섹스를 허락하고는 금세 헤어지는 식의 관계를 수십 차례 반복했을 겁니다.

이런 심리 상태의 두 사람은 하루 저녁의 데이트로 굉장히 친밀해집니다. 딘은 신디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기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결혼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신디는 그런 딘에게 감동받고,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오늘, 두 사람의 사랑은 엇갈리고 뒤틀려 있을 뿐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오가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깊이 있는 캐릭터 구축과 섬세한 심리묘사, 치밀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드라마라면 말로 다 풀어내고 말았을 이야기들을 함축적이고도 암시적인 대사와 상황으로 커버하면서 리듬감 있게 영화를 끌어가죠. 확실한 설계도 없이 촬영하고 나중에 편집으로 조지는 경우가 많은 요즘 한국 영화 제작 풍토에서는 나오기 힘든 영화입니다.

미셸 윌리엄스와 라이언 고슬링은 스타일상 잘 어울리는 커플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화를 겪는 스토리 설정이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괜찮은 캐스팅이었죠. 다양한 연령대의 중하층 계급 출신 여성 캐릭터를 멋들어지게 연기해 온 미셸 윌리엄스는, 이 영화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하긴 출세작 <도슨의 청춘일기>에서부터 해온 게 바로 그런 연기였으니까요. 라이언 고슬링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깔끔하게 하고 나올 때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같은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일종의 사회적 루저 캐릭터를 맡으면 튀는 비주얼 때문에 연기가 그닥 도드라지지 않거든요.

촬영은 평균 이상입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앵글과 움직임이 좋은 편이었죠. 과거와 현재 시점에 따라 16mm와 HD를 나눠 사용한 것은 뭐 그냥 설정이니까 그랬다는 것만 알아 두고요. 음악이 귀에 쏙쏙 꽂히는 편이예요. Grizzly Bear 노래가 몇 곡 쓰였죠.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맞물리며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삽입곡 “You and Me”도 좋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다양한 얘기가 머리속에서 튀어 나올 겁니다. 사랑의 열정이란 건 원래 금방 식고 마는 거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비슷한 성장 배경이나 생활 수준이 맞는 상대를 만났어야 하는 거다, 안전한 섹스가 중요하다, 필요할 땐 낙태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자가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여자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그러지 말자고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등등. 주로 결정적 순간에서 왜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관한 그런 얘기들이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주인공들이 선택의 순간에 영화에서와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두 사람의 삶은 달라졌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람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받은 상처는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삶의 국면에서든 파괴적인 요인으로 다시 등장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습니다. 딘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자신의 변치 않는 사랑만 강조하며 자기 식대로 해석한 현실에 안주하려 할 것이고, 신디 역시 여전히 배우자의 감정이나 생각보다는 자기의 상황을 앞세우며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고수할 것이니까요.

결국 문제는 식어버린 사랑도, 다른 성장 배경도, 잘못된 과거의 결정도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게 문제죠. 누구든지 조금씩은 부모에게서 안 좋은 영향을 받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고통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런 건 변명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결혼 생활을 순조롭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은 자기의 문제가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배우자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조금씩이라도 변화시키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결국엔 헤어지는 수 밖에 없겠죠.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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