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준으로 볼 때, 홍상수 감독만큼 작품별 편차가 심한 감독은 드문 것 같습니다. 정말 못 봐줄 영화로 바닥을 기어서 이젠 그만 봐야지 하면, 어느새 괜찮은 작품을 선보이면서 눈길을 잡아끌거든요. 사상 최고의 데뷔작 중 하나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있는 터라 제 기대치가 늘 높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작년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고 학을 뗀 저는, 홍상수 감독 영화는 이제 그만 봐야겠다 결심했죠. 그래서 올해 초의 <하하하>는 그의 장편중 처음으로 패스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괜찮다는 사람이 많아서 보긴 봐야할 것 같네요;) 이번 <옥희의 영화>도 원래는 다른 영화를 보러갔다가 시간을 놓친 탓에 보게 된 겁니다. 영화 보기 전에 혼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랜만에 조조 보러 나왔으니 보고 갈까, 아니면 좋아하는 커피집을 갈까, 혹시 영화가 마뜩치 않으면 주초부터 기분을 잡칠 텐데 등등.

그러나 영화는 생각보다 솔직담백하고 좋았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가진 – 혹은 자기가 경험한 – 얘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고 할까요.

사람의 모든 것은 변하고 입으로 뱉은 말일 수록 진실과는 거리가 멀며, 진심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한때 그렇게도 경멸했던 시스템은 공고하며, 어쩌면 자기 자신도 그 속의 일부가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흙탕 속에 뭔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믿고 싶어하고, 붙잡아두고 싶어하는 마음. 감독은 그게 예술이고 영화가 아니겠느냐고 넌지시 화두를 던집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 작품세계의 어떤 변화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굳이 다른 영화로 얘기하자면 에릭 로메르 영화가 가진 미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다루면서도 관대함을 잃지 않는 넉넉한 시선 말이죠.

이전까지 제가 싫어했던 홍상수 영화들의 문제는, 감독이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속물적인 모습을 까발리면서도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걸 지켜 보는 관객과 함께 조롱하고 비난하는 쪽에 있었죠.

저는 이렇게 찌질한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켜 가차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감독의 태도를 일종의 위선으로 느꼈고 그때마다 많이 불편했습니다. 절대 악한 인간도, 절대 선한 인간도 없는 건데 지나치게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잖아요. 인간은 형편에 따라 분노와 연민을 번갈아 가며 자아내는 변덕스런 존재인데도요.

반면 괜찮았던 작품들일수록 찌질이 남자들이 혼자 추락하지 않도록 적당한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균형을 맞춰 주었죠. 자신의 결함을 인식하고 있고 욕망에도 솔직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약간의 구원과 다음 단계로의 전환 가능성을 제공하면서 드라마를 구해냅니다.

이렇게 볼 때, 감독의 한층 여유로워진 세계관을 대변하는 이 영화가 '옥희'의 영화인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죠.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현명한 균형을 취하는 것은, 가식이나 인위적인 게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솔직한 희망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마음 놓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챙겨 봐도 되는 걸까요? 모르죠. 계속 지켜볼 일입니다.